비교분석;
바람의 나라,
신화의 나라 |
드라마VS신화 |
●바람의 나라는 신화의 나라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원작이 가진 그 판타지적 요소를 굳이 들먹일 것도 없다. 이미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는 너무 많은 신화소가 등장하고 있으므로 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어딘가 익숙하고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이야기 같지 않던가?
<바람의 나라>라는 드라마의 초반 프롤로그 부분을 보는 주요한 재미 중 하나는 바로 이 신화소가 아니었을까 한다. 바람의나라에는 수도없이 많은 신화소가 등장하고 있으니까. 남방계 신화인 난생화소만 빼면 웬만한 영웅신화의 요소는 거의 다 등장하는 것 같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신화소 두 가지가 '신분을 증명해줄 매개체(신표)'와 '버려짐', 그리고 '저주'다.
사실 이 '버려짐'과 '신표'는 아버지 유리왕의 신화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동명왕은 아내 예씨를 부여에 남겨두고 떠나갔고, 부여에 남겨진 아비없는 자식 유리는 집념어린 추적 끝에 일곱 모 난 돌 위의 소나무를 찾아내고, 거기서 칼 조각을 찾아내니까. 이것과 비슷한 신화가 바로 테세우스 신화다. 테세우스는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남겨놓고 간 칼과 샌들을 커다란 바위를 들어 꺼낸 장본인이다.
그러나 무휼의 '신표'는 아비가 아니라 누이가 준 것이며, 쟁취하거나 획득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받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무휼이 받은 이 목걸이는 아버지 유리왕의 이야기보다 [대별왕 소별왕 신화]나 [당금애기 신화]에 더 가깝다. [당금애기] 신화에서 시준 님과 당금애기 사이의 세 쌍둥이는 어머니가 받아둔 박씨 세 알을 그대로 받아 아버지를 찾아가고, 그 아버지의 시험을 통과하여 아들로서 인정받게 되니까. 대별왕 소별왕 신화도 마찬가지 구조다.
●마지막으로 '저주'라는 신화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주는 이 모든 갈등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대천관이 하늘의 저주를 입에 담아 옮기지 않았다면 무휼의 인생은 백 배 쯤 더 평온했을 것이다. 태어나길 평범한 왕자로 태어나 자라나 평범한 왕제로서 장형을 돕는 역할을 했겠지. 이 저주 신화소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저주를 피하기 위하여 아이를 버리지만 도리어 그 버림으로 인하여 저주가 실현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저주받고 버려진 아이는 또 누가 있을까. 가장 먼저 오이디푸스가 떠오른다. 오이디푸스는 발이 부었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누구랑 닮지 않았나? 피와 심장이 없는 자, 무휼이라는 이름과 말이다. 둘 모두 버려질 때 아비가 남겨놓은 흔적이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가 그를 버릴 때 발목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 버렸기에 이런 이름을 얻은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아비 라이오스는 자신을 죽이고 어미인 이오카스테를 범하리라는 신탁에 놀라 아이를 버리지만 코린토스의 목동이 이 아이를 데려다 코린토스의 왕자로 기르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무휼 역시 마찬가지, 아들을 버린 아비 대신 새로운 아비노릇을 하는 형 해명에 의해 무휼은 제왕이나 품어야 할 무엄한 꿈을 감히 품게 된다. 부도를 되찾으리라! 결국 신탁은 실현된다. 오이디푸스는 이 비극적인 운명과 자신의 모든 반운명이 허사였음을 깨닫고 반 미치광이가 되어 스스로 눈을 뽑고 떠돌다 코로노스의 성림에서 죽는다. 무휼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페르세우스, 메두사를 베어 죽인 바로 그 페르세우스다. 사실 무휼은 오이디푸스보다는 페르세우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페르세우스의 아비는 제우스이며, 신성한 혈통이다. 무휼 역시 천손의 장자가 아니었던가. (물론 해명 태자의 사망 후 이야기지만.)
게다가 페르세우스가 베어 죽인 메두사를 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메두사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사통하다가 들켜 뱀 머리칼을 갖게 된 여인이다. 신성과 연결되어있으면서도 '비윤리', '비도덕'의 상징인 것이다.
비윤리와 비도덕을 베어넘긴 페르세우스와 마찬가지로, 무휼 역시 장차 장성하여 국가 체제에 절대적 위기를 낳는 또 하나 신성의 자손을 베어넘긴다. 대소왕이다.(대소왕의 아버지는 금와, 금와는 해부루의 양자이며 곤연 연못의 돌 아래에서 나타난 아이이다.) 그의 일곱 형제와 형제의 수많은 자손은 곧 메두사의 뱀 머리칼이며, 이로 인하여 부여는 멸망하게 된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대소왕의 독선적이고 위험한 카리스마, 사갈과 같은 권력이 타락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들이 닮았다고 해도 남의 신화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 두자. 무휼과 가장 닮은 신화 속 인물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한락궁이와 바리공주가 아닐까.
●신산만산 한락궁이, 판본에 따라 할락궁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이공본풀이>의 주인공이며 운명을 관장하는 전상신이다. 또한 아버지 원강 도령과 어머니 원강암이 사이에서 태어난 일종의 유복자다. 어머니는 서천 꽃밭 꽃 감관이 되어 떠나신 아버지를 배웅하다가 길에서 몸을 풀게 될 처지가 되었다. 모자는 자현 장자에게 노비로 팔려가고, 한락궁이는 노비로 큰다. 자현 장자는 원강 암이에게 몸을 요구한다. 원강 암이는 관습법의 논리로 자신을 보호하고, 그 논리대로 조건이 갖춰지면 몸을 내어줄 것에 대한 담보로 목숨을 건다.
아들이 다 자라 어머니에게 제 아비를 묻게 되자 어머니는 자현장자가 한락궁이의 아비라 거짓 대답한다. 그러나 한락궁이는 자신의 아비가 자현장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아들에게 아비를 알리지 않으려 하는 어머니를 콩 볶는 냄비에 손을 짓누르는 고문까지 해가면서 제 아비의 정체를 알아낸 아들은 아비를 찾아 떠나고, 한락궁이가 떠난 것을 알게 된 자현 장자는 그만 원강 암이를 죽이고 만다.
아버지 원강 도령을 만난 한락궁이는 자신이 건너온 무릎까지 차는 물, 허리까지 차는 물, 목까지 차는 물이 모두 어머니가 세 번이나 죽음을 다짐받고 결국은 자현 장자 손에 죽어 흘린 피였음을 알게 된다. 피끓는 복수심으로 돌아온 한락궁이는 자현 장자 집안을 파멸로 몰아붙인다.
<바람의 나라>에서 어머니처럼 무휼을 길러온 혜압은 결코 무휼에게 그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려주려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모르거니와, 영 이 어두운 벽화 동굴 속에 가둬두어야만 한다 생각한다. 애시당초 해명이 자신에게 아이를 맡기고 간 까닭부터가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혜압의 속내와 무관하게 무휼은 자꾸만 바깥을 향한다. 아이가 자라서 소년이 되면 반드시 제 정체를 의심하게 되어있다. 고대의 부계 사회에서 그 정체라는 것은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다. 아버지가 아니면 아들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울타리에 갖혀있던 아들이 어미를 배반하고 아비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돌아와 복수를 시작한다. 유리왕은 자현 장자이며 해명은 이별 앞에 무력했던 원강 도령에 다름이 아니다. 해명은 유리왕의 필요에 의해 허무하게 목숨을 버린다. 그리고 혜압 역시도 상처만 남은 채 배극에 의해 국가 체제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달라진 것은 아들에게 있어서 어미와 아비의 비중 정도인데, 이것은 부계 중심의 사회로 흘러가면서 생기는 현상에 불과하다. <이공본풀이>역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그 중간 어느 지점이니.
(덧말:여기서 해명을 무휼의 아비로 바로 대치시키는 것에 대해 비약이 있을 수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제 메인에 오른 블로거의 포스트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패스.)
혈연의 힘으로 무휼이 부도를 되찾는 해명을 계승하게 되리라는 것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다만 비극은 자현 장자가 무휼의 진짜 아비였다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이공본풀이>와 바람의나라 12회까지는 큰 얼개가 일치한다. 이제까지의 프롤로그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이공본풀이>의 변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