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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람의 나라, 다양한 신화와 함께 보니 재미가 2배

재보기 2008. 10. 28. 14:16

 

 


 

01

02
  1. 01 버림받은 아들, 무휼
  2. 02 무휼이 받은 신표, 목걸이
  3. 03 바람의 나라 포스터

 

 

 

 

 

 

 

 

 

 

 

 

 

 

 

 

 

 

 

 

 

 

 

 

 

 

 

 

 

 

 

 

 

 

 

 

 

 

 

 

 

 

  •  무휼을 키워온 해명의 연인, 혜압

     

     

     

     

     

     

     

     

     

     

     

     

     

     

     

     

     

     

     

     

     

     

     

     

     

     

     

     

     

     

     

     

     

     

     

     

     

     

     

     

     

     

     

     

     

     

     

     

     

     

     

     

     

     

     

     

     

     

     

     

     

     

     

  • 해명은 무휼에게 사회적 아버지였다

     

     

     

     

     

     

     

     

     

     

     

     

     

     

     

     

     

     

     

     

     

     

     

     

     

     

     

     

     

     

     

     

     

     

     

     

     

     

     

     

     

     

     

     

     

     

     

     

     

     

     

     

     

     

     

     

     

     

     

     

     

     

     

     

     

     

     

     

     

     

     

     

     

     

     

     

     

     

     

     

     

     

     

     

     

     

     

     

     

  • 속임수였다,  갓난 아기 무휼을           베어버린것은.

     

     

     

     

     

     

     

     

     

     

     

     

  • 월선스님은 편조가 지귀라고 말했다

     

     

     

     

     

     

     

     

     

     

     

     

     

     

     

     

     

     

     

     

     

     

     

     

     

     

     

     

     

     

     

     

     

     

     

  • 03

    비교분석;

     

    바람의 나라, 

    신화의 나라

    드라마VS신화

    ●바람의 나라는 신화의 나라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원작이 가진 그 판타지적 요소를 굳이 들먹일 것도 없다. 이미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는 너무 많은 신화소가 등장하고 있으므로 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어딘가 익숙하고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이야기 같지 않던가? 
     
    <바람의 나라>라는 드라마의 초반 프롤로그 부분을 보는 주요한 재미 중 하나는 바로 이 신화소가 아니었을까 한다. 바람의나라에는 수도없이 많은 신화소가 등장하고 있으니까. 남방계 신화인 난생화소만 빼면 웬만한 영웅신화의 요소는 거의 다 등장하는 것 같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신화소 두 가지가 '신분을 증명해줄 매개체(신표)'와 '버려짐', 그리고 '저주'다.
     
    사실 이 '버려짐'과 '신표'는 아버지 유리왕의 신화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동명왕은 아내 예씨를 부여에 남겨두고 떠나갔고, 부여에 남겨진 아비없는 자식 유리는 집념어린 추적 끝에 일곱 모 난 돌 위의 소나무를 찾아내고, 거기서 칼 조각을 찾아내니까. 이것과 비슷한 신화가 바로 테세우스 신화다. 테세우스는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남겨놓고 간 칼과 샌들을 커다란 바위를 들어 꺼낸 장본인이다.
     
    그러나 무휼의 '신표'는 아비가 아니라 누이가 준 것이며, 쟁취하거나 획득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받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무휼이 받은 이 목걸이는 아버지 유리왕의 이야기보다 [대별왕 소별왕 신화]나 [당금애기 신화]에 더 가깝다. [당금애기] 신화에서 시준 님과 당금애기 사이의 세 쌍둥이는 어머니가 받아둔 박씨 세 알을 그대로 받아 아버지를 찾아가고, 그 아버지의 시험을 통과하여 아들로서 인정받게 되니까. 대별왕 소별왕 신화도 마찬가지 구조다.
     
    ●마지막으로 '저주'라는 신화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주는 이 모든 갈등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대천관이 하늘의 저주를 입에 담아 옮기지 않았다면 무휼의 인생은 백 배 쯤 더 평온했을 것이다. 태어나길 평범한 왕자로 태어나 자라나 평범한 왕제로서 장형을 돕는 역할을 했겠지. 이 저주 신화소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저주를 피하기 위하여 아이를 버리지만 도리어 그 버림으로 인하여 저주가 실현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저주받고 버려진 아이는 또 누가 있을까. 가장 먼저 오이디푸스가 떠오른다. 오이디푸스는 발이 부었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누구랑 닮지 않았나? 피와 심장이 없는 자, 무휼이라는 이름과 말이다. 둘 모두 버려질 때 아비가 남겨놓은 흔적이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가 그를 버릴 때 발목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 버렸기에 이런 이름을 얻은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아비 라이오스는 자신을 죽이고 어미인 이오카스테를 범하리라는 신탁에 놀라 아이를 버리지만 코린토스의 목동이 이 아이를 데려다 코린토스의 왕자로 기르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무휼 역시 마찬가지, 아들을 버린 아비 대신 새로운 아비노릇을 하는 형 해명에 의해 무휼은 제왕이나 품어야 할 무엄한 꿈을 감히 품게 된다. 부도를 되찾으리라! 결국 신탁은 실현된다. 오이디푸스는 이 비극적인 운명과 자신의 모든 반운명이 허사였음을 깨닫고 반 미치광이가 되어 스스로 눈을 뽑고 떠돌다 코로노스의 성림에서 죽는다. 무휼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페르세우스, 메두사를 베어 죽인 바로 그 페르세우스다. 사실 무휼은 오이디푸스보다는 페르세우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페르세우스의 아비는 제우스이며, 신성한 혈통이다. 무휼 역시 천손의 장자가 아니었던가. (물론 해명 태자의 사망 후 이야기지만.) 
    게다가 페르세우스가 베어 죽인 메두사를 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메두사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사통하다가 들켜 뱀 머리칼을 갖게 된 여인이다. 신성과 연결되어있으면서도 '비윤리', '비도덕'의 상징인 것이다.
     
    비윤리와 비도덕을 베어넘긴 페르세우스와 마찬가지로, 무휼 역시 장차 장성하여 국가 체제에 절대적 위기를 낳는 또 하나 신성의 자손을 베어넘긴다. 대소왕이다.(대소왕의 아버지는 금와, 금와는 해부루의 양자이며 곤연 연못의 돌 아래에서 나타난 아이이다.) 그의 일곱 형제와 형제의 수많은 자손은 곧 메두사의 뱀 머리칼이며, 이로 인하여 부여는 멸망하게 된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대소왕의 독선적이고 위험한 카리스마, 사갈과 같은 권력이 타락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들이 닮았다고 해도 남의 신화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 두자. 무휼과 가장 닮은 신화 속 인물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한락궁이바리공주가 아닐까.
     
    신산만산 한락궁이, 판본에 따라 할락궁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이공본풀이>의 주인공이며 운명을 관장하는 전상신이다. 또한 아버지 원강 도령과 어머니 원강암이 사이에서 태어난 일종의 유복자다. 어머니는 서천 꽃밭 꽃 감관이 되어 떠나신 아버지를 배웅하다가 길에서 몸을 풀게 될 처지가 되었다. 모자는 자현 장자에게 노비로 팔려가고, 한락궁이는 노비로 큰다. 자현 장자원강 암이에게 몸을 요구한다. 원강 암이는 관습법의 논리로 자신을 보호하고, 그 논리대로 조건이 갖춰지면 몸을 내어줄 것에 대한 담보로 목숨을 건다.
    아들이 다 자라 어머니에게 제 아비를 묻게 되자 어머니는 자현장자가 한락궁이의 아비라 거짓 대답한다. 그러나 한락궁이는 자신의 아비가 자현장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아들에게 아비를 알리지 않으려 하는 어머니를 콩 볶는 냄비에 손을 짓누르는 고문까지 해가면서 제 아비의 정체를 알아낸 아들은 아비를 찾아 떠나고, 한락궁이가 떠난 것을 알게 된 자현 장자는 그만 원강 암이를 죽이고 만다.  
    아버지 원강 도령을 만난 한락궁이는 자신이 건너온 무릎까지 차는 물, 허리까지 차는 물, 목까지 차는 물이 모두 어머니가 세 번이나 죽음을 다짐받고 결국은 자현 장자 손에 죽어 흘린 피였음을 알게 된다. 피끓는 복수심으로 돌아온 한락궁이는 자현 장자 집안을 파멸로 몰아붙인다.
     
    <바람의 나라>에서 어머니처럼 무휼을 길러온 혜압은 결코 무휼에게 그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려주려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모르거니와, 영 이 어두운 벽화 동굴 속에 가둬두어야만 한다 생각한다. 애시당초 해명이 자신에게 아이를 맡기고 간 까닭부터가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혜압의 속내와 무관하게 무휼은 자꾸만 바깥을 향한다. 아이가 자라서 소년이 되면 반드시 제 정체를 의심하게 되어있다. 고대의 부계 사회에서 그 정체라는 것은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다. 아버지가 아니면 아들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울타리에 갖혀있던 아들이 어미를 배반하고 아비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돌아와 복수를 시작한다. 유리왕은 자현 장자이며 해명은 이별 앞에 무력했던 원강 도령에 다름이 아니다. 해명은 유리왕의 필요에 의해 허무하게 목숨을 버린다. 그리고 혜압 역시도 상처만 남은 채 배극에 의해 국가 체제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달라진 것은 아들에게 있어서 어미와 아비의 비중 정도인데, 이것은 부계 중심의 사회로 흘러가면서 생기는 현상에 불과하다. <이공본풀이>역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그 중간 어느 지점이니.
     
    (덧말:여기서 해명을 무휼의 아비로 바로 대치시키는 것에 대해 비약이 있을 수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제 메인에 오른 블로거의 포스트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패스.)
     
     혈연의 힘으로 무휼이 부도를 되찾는 해명을 계승하게 되리라는 것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다만 비극은 자현 장자가 무휼의 진짜 아비였다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이공본풀이>와 바람의나라 12회까지는 큰 얼개가 일치한다. 이제까지의 프롤로그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이공본풀이>의 변주인 것이다.  
        

    왕과 영웅

    아버지와 아들, 영웅의 별과 제왕의 별

     

  • 유리왕 자식을 버린 아버지, 고구려의 2대 왕

     

     

    ● 제왕의 별과 영웅의 별은 다르다. 제왕의 별은 영웅의 별을 죽일 수 밖에 없게 되어있다.

     

     

    제왕의 숙명

    그리고

    왕이기를

    포기해버린 왕

    왕VS영웅

    진짜 아버지가 되지 못해 언제고 아들을 증오할 수 밖에 없었던 유리왕과 그 유리왕의 밑에서 숨을 죽이며 자라온 무휼, 그리고 그 무휼이 끔찍히 아끼는 아들이지만 아버지와의 사이에 살성이 끼인 아들 호동. 이 부자 삼대의 이야기가 원작 <바람의나라>였다. 그리고 무수한 그 제왕의 별과 제왕을 끼고 도는 별들의 이야기가 또한 <바람의 나라>였다. 드라마 <바람의 나라> 역시 부자 삼대의 갈등이 그 축이 되는 바,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영원한 동일시의 대상이면서 또한 영원한 타도의 대상이기도 하다. 부자의 갈등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것이다.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거나 존경하면서도 그 아버지를 꺾어 넘기지 못하는 아들의 겉돎과 반항, 이런 것.
     
    무수한 투쟁으로 권좌에 올랐다는 것은 피도 눈물도 없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과연 유리왕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가? 아니다. 유리왕은 피와 눈물에 절은 인간이다. 영웅일지는 모르나 제왕은 아니다. 유리왕 그 자신 역시 영웅 신화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유리왕은 제 손으로 아들을 베어 넘기는 짓 따위는 못하며, 칼 던져주며 죽어라 소리 지르지도 못한다. 그냥, 아들이기 때문이다. 유리왕은 제 아들이 왕자요 태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이와 관련해서 하는말인데, 작년에 플라톤의 <국가>를 읽다가 때려치운 적이 있었다.(어려웠고 재미도 없었다. 꿈의해석은 재미라도 있었건만.) 이 <국가>에서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눈다. 다스리는 자, 지키는 자, 그리고 평범하여 물건을 만들고 그 물건을 서로 필요한대로 교환하며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자들. 재미있는 점은 다스리는 자와 지키는 자들을 양성하는 법이다. 이들 두 부류에 대해서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기본적인 것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어떤 사적 삶도 가질 수 없도록 거세해버린다. 남성과 여성의 성생활은 부류 내에서 상대에 한정을 두지 않으며, 태어난 아이의 아비 역시 절대 따지지 않는다. 자식에 사련을 가지면  사회 전체를 지키고 다스려야 할 그 눈이 흐려진다나.
     
    유리왕은 자식에 사련을 가짐으로써 통치자로서 자격을 잃어버린다.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하나 그렇다는 것이다. 유리왕이 끊임없이 도전받는 이유도 사실은 이것인지 모른다.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기 자식까지 바침으로써 아낌없는 천벌을 받았고, 그래서 유리왕은 영웅일수는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끝까지 자기 손을 더럽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통치자, 다스리는 자, 왕일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유리왕의 삼남 무휼은 고구려의 태종 이방원으로서 주목할 만 한 인물인 것이다. 물론, 자의든 타의든 유혈 참극(태종:1,2차 왕자의 난, 무휼:도절과 해명의 요절)을 거쳐서 왕위에 올랐다는 점, 둘 다 3대 왕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 왕조에서 최초로 내가 왕이라는 자각, 더 이상 어디에서도 개인일 수 없다는 고독을 아는 임금이었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제시하는 진정한 통치자가 등장한 것이다.
     
      
  • 유리왕은 개인적인 감정과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원작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원작에서 유리왕은 그 자신의 유년의 컴플렉스에 의해 끝도 없이 자신을 가두고 버려 놓고서도 홀로 버림받아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무휼의 세계도 이 유리왕의 세계보다는 훨씬 확장되었지만 전쟁을 실감 못하고 다만 비참한 민초들의 얼굴만 실감하던 호동과 해색주의 세계와는 겹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나 거대한 시산혈해인 아버지의 세계를 넘으려 아등바등하는 호동이 비극적인 것이다. 자신의 세계가 아닌 것에 대해서까지도 품어야 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원작에 의거한 서술이나, 드라마가 곧 어둡고 냉정한 제왕 무휼의 얼굴을 보여주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무휼은 고구려 대지의 하늘에 뜬 첫 제왕의 별이다. 그리고 제왕의 별과 영웅의 별은 언제나 상극이다. 제왕에게 영웅은 역천의 싹이며, 영웅에게 제왕은 떨어뜨려야만 하는 별이다. 본시 제왕의 별이 아니나 제왕이 된 유리 때문에 제왕의 별과 영웅의 별은 역전된다. 영웅은 제왕이 되었으므로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기어오르는 본래 제왕의 별을 꺾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것으로 무휼과 유리왕의 갈등은 예고된 것이 된다.
  • 무조신과 신왕, 신화와 현실 사이

    입무자의 여정과 닮은 무휼의 떠남, 그리고 예정된 딜레마

    바리데기

    VS

    무휼

    신화 그리고 역사

     

    ● 위에서 바리공주 이야기를 언급하여 벌려두었음에도 정리하지 않았다. 다른 파트에 끼워 이야기 하기에 바리공주와 무휼의 이야기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국가 체제 바깥의 인간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국가 체제는 병들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병든 체제를 소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다.

     

     

  • 무휼 존재가 지워져버린 버림받은 아들

     

    12회에서 아버지에게 부정당하고 13회에서 무휼은 출궁한다. 사실 여태껏 무휼은 바리공주가 그랬듯 국가 체제 바깥의 사람이었다. 인간의 부락과는 단절된 어두침침한 신묘인 기린굴, 그 속의 망령같은 것이었다. 그 체제 바깥의 자손이 병을 고칠 새 가치를 들고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봉건국가에서 아들은 곧 체제 유지의 수단이다. 그런데 불라국에서는 더 이상 아들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오구대왕이 애초에 길대왕비와 결혼할 때 해를 당겨서 결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종의 '잘못된 결합'에 의한 죄받음인 것이다.  

     

    무휼과 바리는 둘 모두 아버지에 의해 그 존재를 부정당했으며, 그 아버지의 사회, 즉 국가는 지금 병을 앓고 있다. 오구대왕은 왕권에 눈이 멀어 가장 기본적인 인간사의 윤리를 저버렸다. 유리왕 역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아들을 버렸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더 큰 유리왕의 죄악은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자식에게 있어서 '선한 아버지'라는 자위는 될 수 있으나 사회 전체나 그 아들 개인에 있어서도 '좋은 아버지', '옳은 아버지' 가 되지는 못하게 만든다.

     

    유리왕은 최선을 다하는 왕이요, 영웅이지만 결코 좋은 결과를 낳는 성군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귀족들과의 알력으로 소란이 잦아들 날이 없으며, 그것이 고구려의 병이다. 강력한 왕권과 카리스마를 가진 임금의 부재. 고구려의 리더인 유리왕은 자신의 사적 미련에 얽매여 사회 전체의 존속에 위기가 될 수 있는 갓난 아들을 죽이지 못했다. 이것이 유리왕의 한계였다. 제왕의 자리에 스스로의 모든 것을 인신공양 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이런 유리왕의 개인적임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무휼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호동의 비극은 거기서 출발한다) 또한, 무휼이 체제 바깥을 떠돌며, 혹은 체제 안에서도 항상 밖으로 밀려나면서 새로운 가치관, 체제의 병을 치유할 약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사회 바깥에서 사회 안으로 사회 발전의 새로운 힘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에서 바리공주는 무조신이 되었고 무휼은 신왕이 된다.

     

    그러나 신화와 현실이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상상의 소산인 신화만큼 현실이 달콤하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신화 속 바리공주는 아버지가 해주겠다는 모든 보상도 마다하고 다시 국가 밖으로 떠난다. 그리하여 국가와 그 시스템상의 비윤리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의미로서 팽팽한 대립항을 이룬다. 스스로의 내면을 살해해야만 하는 딜레마를 피할 수 있는, 개인적으로도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휼은 다르다. 국가 체제의 최정점, 좀 더 발전한 형태라면 국가 그 자체인 이 됨으로써 그들의 지배자가 된다. 대립항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인 '딜레마'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신돈VS무휼

     

    비교해보기

    대립항과 동일화

    ● 이는 드라마 <신돈>(2006, MBC)에서도 한 차례 다뤄진 바 있는 주제다. 거침없는 개혁자로서 공민왕의 신임을 독차지하며 전민변정도감 등 혁신적 정책을 추진하던 신돈이 어느 순간 스스로가 개혁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자신을 느끼게 된 것이다.

     

    드라마에서 그는 줄곧 선덕여왕을 너무나도 사모하여 결국 불귀신이 된 '지귀'의 환생으로 묘사된다. 지귀를 불귀신으로 만든 것은 노비는 여왕을 사모할 수 없다는 귀천의 논리였다. 천년(드라마에서는 천년이라 말하나 실제 연대를 따지면 700년 정도다) 전에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낸 지독한 욕망, 혹은 원한이 바로 '만민 평등'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또 옥천사 사노의 아들로 태어난다.

     

     

     

  • 신돈 권력의 최정점에 서버린 혁명가

     

    그래서 그는 운명적으로 '천민이 춤추는 세상'을 꿈꾸며 어찌보면 역심으로까지 비칠 수 있는 극단적인 사회를 꿈꾼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국가 그 자체이며 체제의 최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공민왕과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공민왕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면서 국가 체제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위와 권세를 갖게 된다. 영도첨의사사사 겸 판중방감찰사사 겸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의 권력과 힘! 자신이 뒤집어 엎으려던 '신분제 사회'의 최 정점! (소제를 홍농왕으로 폐위하고 헌제를 즉위시킨 <삼국지연의>의 동탁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체제를 뒤집어 엎으려던 그의 야망이 곧 체제 그 자체과 거의 동일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죽여야만 하는 비극적인 운명으로 치닫는다.

     

    무휼 역시 마찬가지이다. 원작에서 겨우 열 아홉, 아직도 매일 키가 크는 어린 무휼은 아버지와 같은 왕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마음에 철가면을 쓰고 그의 내면과 외면을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아버지 유리왕과 같은 개인적인 왕은 무휼이 추구하는 왕의 모습과는 정 반대의 형태이다. 그리하여 무휼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이고 여린 얼굴을 철가면 속에 가둔다. 그 자신이 이루려던 바를 위하여 스스로를 학대 혹은 또 다른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유리왕은 원작과 다른 형태, 다른 의미기는 하지만 분명히 원작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왕이다. 그리고 무휼은 이 드라마가 '부자 3대의 가족사'라는 점에서 분명 아버지의 세계를 뛰어 넘으려 들것이다. 그러자면 아버지와 같은 개인적 면을 가질 수 없다. 그 와중에서 극히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랑하는 '연'과 그 연이 남겨두고 간 유일한 혈육 '호동'은 무휼의 내면에서 죽여야만 하는 부분이 된다.  언제나 상처 입고 고통받기 때문에 그 상처와 흐르는 피를 닦아주는 유일한 존재 '연'은 무휼에게 있어서 절대적이다. 절대적 사랑과 운명적 과제가 서로 상충하는 딜레마가 무휼의 앞날에도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 2007 Copyright season2.

     

         

     

     

     

     

     

     

     

     

     

     

     

     

     

     

     

     

     

     

     

     

     

     

     

     

    출처 : 드라마 이야기
    글쓴이 : 견우와 직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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